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고슬라비아 전쟁 (문단 편집) == 후일담 - 끝나지 않은 전쟁 == 국제전으로 번진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의 전쟁사적 의의가 있다면, ''''[[공군]]만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미국과 [[NATO]]의 압도적인 힘에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외교적 압박이 동원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치 외교적 압박은 여느 전쟁에서도 늘 있는 문제라 공군만으로 승리했다는 표현에 크게 무리는 없다. 다만 풍선 위장 등을 사용한 세르비아는 항복 후 '모두 파괴되었다고 보고된' 전차 수백대를 끌고 후퇴하며 충격을 안겨주었다. 잘 위장, 엄폐된 목표에 대해서 공군의 무력함을 알려주는 사례다. 그리고 새로운 정밀탄약 [[JDAM]]의 등장 역시 의미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반에 등장해 1990년대 초반 [[걸프 전쟁]]에서 꽃을 피운 [[LGB]](레이저 유도탄)는 중동 전선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LGB의 유도 레이저가 악천후, 연기, 습도 등에 상당히 취약해서 날씨가 나쁘거나 연기 등이 심한 지역에서는 유도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미군]]은 관성 항법 장치와 위성 항법 장치([[GPS]])를 한데 묶은 유도장치로 탄약을 목표로 조종하는 JDAM을 개발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다. 최초의 실전 투입인 코소보 사태에서는 [[B-2]] 폭격기만이 이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편화되어 JDAM이 없는 미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새로운 기술적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NATO군을 속인 유고슬라비아군의 기만전술 및 장비은폐술의 향상도 의의가 있다. 고가의 유도장비를 허접한 구조물로 속여낸 기만-은폐술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더욱 발전했고, [[북한]]도 코소보 사태 종전 후 현지에 무관을 파견해 정보를 습득했다고 한다. 참호 파놨다가 무진장 얻어맞은 [[걸프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또한 '지상군의 [[아웃소싱]]' 경향이 드러난 것도 이 전쟁이 최초였다. 미국 등 서방국들은 공군과 같은 첨단 장비 위주로 작전을 수행하고, 지상군은 가급적 쓸만한 무장세력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1999년]] 코소보에서는 코소보 해방군(10,000 ~ 20,000명 참전, 1,700~4,000명 사망)이, [[2001년]] [[아프간전]]에서는 [[북부동맹(아프가니스탄)|북부동맹]],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쿠르드 민병대,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는 리비아 반군이 그 역할을 했다. 첨단 전쟁 앞에서 지상군의 역할이 상당히 반감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전쟁은 지상군이 목표를 점령해야 끝나기 때문에 지상군이 전혀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한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다만 폭격 기술의 발달과는 별도로 공군의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나게 한 전쟁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전쟁 두 사례 모두 공군의 대대적인 투입하에 거둔 승리인 것은 맞지만 그 세부사항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이 정치적 압박을 무기로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에 가까웠다. 만일 세르비아가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작정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면]] NATO 공군이 정말 효과적으로 세르비아군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실제로 NATO에서 공습을 선전한 것과는 달리 세르비아군의 중장비와 병력은 상당수가 무사히 고국으로 되돌아갔으며, 객관적인 지표로 보았을 때 NATO에서 직접 정예 지상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서 공군만으로 세르비아군을 멈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더군다나 세르비아가 동원한 것은 본격적인 정규군도 아니고 대다수가 세르비아 계열 민병대 등의 비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점수가 더욱 깎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공습은 지상군과 연계했을 때 최적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 공군 단독으로 공습을 시행한다면 공포효과 이상의 것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결과도 될 수 있다. 물론 NATO군이 공습을 못했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공군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로 일어난 일이었다. 가격대비 화력이 매우 좋은 육군과는 달리 공군은 한 소티당 들어가는 돈이 화력에 비해 정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육군의 경우 목표지점에 [[자주포]] 한 대만 동원한다면 그 자주포를 이동시키는데 드는 기름값만 제하고서 수십 발의 휴행탄을 모조리 쏟아부어 박살을 낼 수 있지만, 공군의 경우에는 자주포탄 두세 개 정도 화력을 지닌 폭탄을 두어 개 떨구는 데 상당한 양의 고급 항공유가 소모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복귀 후에는 부단한 고급 정비를 필요로 한다. 전투기란 건 그냥 띄우는 것만으로도 항공유 수천만원이 날아가고, 수십 분 비행하는 데도 그만큼 들어간다. 북한이 괜히 전투기 못띄우는 게 아니다. 단독작전에서의 현대 공군의 한계를 최초로 체감해 본 것이 유고 내전이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겠다. 한편 코소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전쟁의 두 핵심 당사자들과 그 정당들이 정권을 상실했다. 우선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은 1990년대 후반에 경기침체로 반감이 커지며 지지율이 떨어지던 상황에서 1999년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떴고, 이듬해인 2000년 대선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참패하여 사회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밀로셰비치도 장기화된 경제난으로 지지율이 떨어진 상태에서 치러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인 코슈투니차가 결선투표 없이 과반수 득표를 확보한 선거결과를 조작해서, 결선투표를 진행하려하자 반발한 야당 지지자들이 시위를 일으켜고, 세르비아 당국에서도 시위진압을 거부하자 결국 밀로셰비치는 선거패배를 인정하고 추한 모습으로 하야했다. 이렇게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간의 극한갈등은 세르비아 사회당과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의 정권상실로 일단 수면아래로 가라앉았고,[* 다만 2000년대 후반 이래로 세르비아 사회당은 연정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정권에 참여하고 있고,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도 2000년대 중반에 세를 어느정도 회복해서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과 함께 양대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정권에 복귀했다해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나 인적자원의 손실이 위낙에 컸기때문에 1990년대만큼의 막장성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둘다 인구감소로 골머리를 앓는 나라이기도 하고.] 이후로 연방 붕괴 과정에서 세르비아와 함께 연방에 잔류하기를 결심했던 [[몬테네그로]]는 애초에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할 때 드러났듯 코소보의 독립 요구로 촉발된 코소보 전쟁의 영향으로 독립을 요구했다. 반면 세르비아는 [[2003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으로 바꾸고, 국방, 외교를 제외한 모든 정치적 주도권을 몬테네그로에게 양보하는 등 몬테네그로의 이탈을 저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몬테네그로는 [[2006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강행했다. 당시 몬테네그로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결정한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대표팀이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참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사전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결국 2006년 월드컵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의 마지막 월드컵이 되었다. 또한 제3세계의 리더로 활동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깔아둔 예비군 인프라가 부정적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2차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수만 명과 대결했을 정도로 탄탄한 예비군-민병대 자원은 내전에서도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90년대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맞닥뜨린 걸프전에 이은 두 번째 시험대였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세계의 경찰"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만방에 드러냈지만, 내실이 크지 않은 성과와 여러 망신살로 반전 세력 등에게 '전쟁광'이란 비판과 국내 입지 약화도 면치 못했다. 이 전쟁은 대통령 권한에 의해 행정부 단독으로 치러진 것이었고, 당시 공화당이 우세였던 미국 의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의회의 동의가 필수적인 지상군 투입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오늘날 [[시리아 내전]]에서도 드러나듯 이런 문제는 정당 성향보다는 의원 개개인의 의견에 따라 갈리는 측면이 있지만, 미 상하원의 다수 의원들은 전쟁, 그것도 행정부 독단으로 치러지는 전쟁에 우호적이지 못하다. 클린턴의 개입은 뒤에 벌어지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비하면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등의 나름의 근거가 있었지만, 상대방의 전쟁범죄를 근거로 이쪽에서의 참전과 살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패권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상황에 직결되는 문제다.''' 1994년 [[북핵문제]]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가 공군 폭격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다. 당시 한국은 군대의 현대화가 제대로 안 된 상태였고 북한은 반대로 전투력이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경제적인 손실도 상당했을 것이다. 미국이 북폭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이다. [[2013년]] 시리아 사태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https://m.yna.co.kr/view/AKR20130615026400009|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미국 내의 반대 여론은 정말 개입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등' 같은 것"이란 것이란 주장으로, 요약하면 개입할 때 국내여론 걱정으로 개입하지 못하면 나중에 여론이 반대로 흘렀을 때 대통령만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경제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결국 불개입으로 결론났다. 반대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무차별 공습과 국지전을 수행할 러시아군을 파병하고 군사장비를 지원하여 시리아 반군과 ISIS들을 토벌하며 시리아 내전을 정부군의 우세로 이끌어 튀르키예와 시리아 간의 불화를 이용하면서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튀르키예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등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장악하게 된다. 이것은 미국이 중동 통제를 못하게 된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적 실책이 되었고,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